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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대회7승의 신화 남긴살아있는 전설 진 사라젠
1920년대와 30년대를 대표하는 프로골퍼 진 사라젠(1902~1922년). 전미오픈을 시작으로 메이저대회 7승의 신화를 창조한 그는 모든 골퍼들이 애용하고 있는 센드웨지를 고안해 낸 사람이다.

아버지의 골프에 관한 심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의지와 불굴의 투지로 제2회 마스터즈 대회에서 더블이글(알바트로스)를 이끌어 낸 그는 골프사에 영원히 살아있는 전설이다.

골프에 대한 심한 편견을 가진 아버지 뉴욕의 맨하탄에서 동북쪽으로 20마일쯤에 「해리슨」이라는 작은 거리가 있다.
그곳에는 페드리크 사라체니라는 이탈리아에서 이민온 사람이 살고 있었다. 1902년 2월 27일, 이날은 사라체니에게는 뜻깊은 날이다.
왜냐하면 그의 아들 유진」이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훗날 골프계의 영웅 진 사라젠이다. 신대륙으로 이민온 페드릭은 사제의 서품을 받은 솜씨 좋은 목수였다. 그러나 그는 영어를 할줄 몰라 새로운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그의 아들 유진은 학교에 들어가기전부터 가까운 역구내에서 선데이 이브닝포스트지 등의 신문을 팔아서 가계를 돕는 적극적인 아이였다. 유진이 여덟살이 되던 어느날, 골프장에서 캐디를 하면 좀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리치몬트CC에서 캐디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일은 3년후까지 계속되어 어파워미스CC에로 옮겨가기도 했다.

그곳의 캐디동아리에는 훗날 텔레비전쇼를 주름잡았던 에드·설리번이 있었다. 캐디일에 충실한 나날을 보내던 유진은 어느날, 손님의 눈을 피해 제멋대로 샷을 해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볼이 큰 아치를 그리며 멋지게 그린에 올라간 것이다. 그는 이날의 샷을 잊을 수가 없어 언젠가는 골퍼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최초로 하게 되었다. 완고하고 부지런한 아버지는 유진이 골프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말에 반대했다.

왜냐하면 목수처럼 기술이 있다면 비록 학교에 가지 않아도 생계에는 지장이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그런 생각은 12년후인 1922년, 유진이 불과 20세의 나이로 전미오픈에서 우승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골프에 관한한 심한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유진 사라체니에서 진 사라젠으로 개명 유진은 이러한 아버지의 생각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1917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목수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골프에 대한 향수는 좀체로 지워지지 않았다.

항상 골프장에서 일하기를 바라는 유진과 그의 아들이 숙련된 목수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는 마찰이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진은 아버지의 파산으로 코네티컷주의 레밍턴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생사를 헤맬만큼 심한 폐렴에 걸리기까지 해 투병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병이 그의 인생에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병원에서 퇴원할 때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병은 공기가 좋은 곳에서 일을 해야합니다" 병상에서도 항상 프로골퍼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있던 그에게 희망이 비치고 있었다. 퇴원후 그는 브리지포트 골프장에서 다시 캐디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속프로인 얼 슈즈의 도움을 받아 틈틈이 스윙 연습을 하였다.

유진은 자신이 먼훗날 프로골퍼로서 어울리는 자신의 이름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끝에 「유진사라체니」를 「진사라젠」으로 개명했다. 사라젠은 프로가 된 후에도 스코어를 망치는 일이 많았다. 그 원인의 대부분이 벙커샷임을 깨닫게 되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클럽을 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무렵의 배행기는 상승할 때 수평의 꼬리 날깨가 위를 향하지 않고 아래로 향한 것에 힌트를 얻어 9번 아이언을 가지고 모양을 변형시켜보기도 하고 솔에 납덩이를 붙여보기도 했다.

이런 시행착오를 되풀이한 끝에 드디어 샌드웨지를 고안해냈다. 뿐만아니라 벙커샷은 클럽을 아웃사이드로 휘둘러 올렸다가 볼뒤 모래면에 헤드를 떨어뜨리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사라젠이 발명한 샌드웨지를 벙커에서 고민하는 많은 골퍼에게 헤아릴 수 없을만큼의 도움을 주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행기의 수평꼬리날개에 착안해 센드웨지 고안 사라젠은 1927년부터 5년에 걸쳐서 20개의 경기에서 우승한 전적을 기록했다. 1933년, 제3회 전미프로선수권을 제패한 후, 조 커크우드와 함께 남미제국을 순회하는 투어에 나섰다. 그 때문에 1934년의 제1회 마스터즈 골프대회 (그때는 오거스타내셔널 인비테이션이라고 불렸으며, 마스터즈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38년부터이다)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듬해인 35년 마스터즈대회에서 첫날 68, 2일째 71, 3일째 73을 기록해 선두인 크레이그 우드에게 3타를 뒤지고 있었다. 최종일 15번홀(당시는 485야드, 파5홀)에서의 사라젠은 드라이버샷이 가볍게 훅이 걸려 상당한 거리를 벌게 되었다. 사라젠과 같은 조를 이뤄 플레이하던 워터 헤이건이 2타지점으로 걸어가고 있던중, 오른쪽 18번그린에서 선두인 우드가 최종홀을 버디로 마무리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시점에서는 누구나 우드가 우승할 것이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실제로 신문기자의 인터뷰와 이튿날 아침 신문을 장식할 사진촬영도 시작하고 있었다. 또 마스터즈위원회는 상금수표의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사라젠은 15번홀에서 세컨샷을 치기전에 자신의 캐디인 스터브파이프에게 이 경기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몇타가 필요한지를 물었다. 그랬더니 캐디는 「4개의 3, 3, 3, 3, 3이 필요」하다고 사라젠에게 대답했다.

기적적인 알바트로스로 마스터즈에서 역전우승 2타지점에 도착해보니 그다지 좋은 라이는 아니었다. 그래서 사라젠은 3번우드가 아닌 4번우드를 사용하기로 했다. 연못넘기기 「투온」을 노려친 볼은 약간 낮은 탄도를 그리면서 핀을 향해서 곧장 날아갔다. 갤러리의 환성이 터지는 것을 들은 사라젠은 볼이 그린에 올라갔다고 생각하며 그린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그 상황에서 단지 볼이 핀에 얼마나 붙었는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가 그린에 도착했을때 볼은 홀컵안에 있었다. 사라젠은 더블이글(알바트로스)를 낚은 것이다.

그는 나머지의 16, 17, 18, 번홀을 모두 「파」로 마무리해 토탈 282타로 홀아웃해 커크우드와 공동선두가 되었다. 승부는 이튿날인 월요일에 36홀의 플레이오프로 넘어갔다. 사라젠의 스코어는 71, 73로 144타 우드는 75, 84로 마무리해 5타차로 사라젠이 멋진 역전승을 거뒀다. 사라젠의 15번홀 더블이글은 골프사에 있어서 드문극적인 슈퍼샷이다.

이 위업을 기리기 위해 오거스타 내셔널GC의 연못왼쪽에 「사라젠브리지」가 만들어졌다. 성공한 미국인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사라젠도 역시 목장의 주인이 되어 시합이 끝나면 곧장 목장으로 되돌아가서 아름다운 전원풍경 속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 전미오픈(1922.32년)전영오픈(32년), 전미프로선수권(22, 23, 33년)등 메이저대회에 7승을 거뒀고 1920년~30년대를 대표하는 프로골퍼 진 사라센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거대한 목장을 경영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는 진 사라젠 "아버지는 돌아가실때까지 끝내 골프에 강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오직한번 1923년의 전미프로선수권대회를 구경하려고 집에서 5킬로나 걸어서 페르햄CC까지 찾아왔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코스에는 들어오지 않고 10번홀 그린이 보이는 길가에서 보다가 내가 롱퍼트를 놓치는 것을 보고는 지체없이 돌아갔다. "그리고는 그걸 놓치다니 역시 넌 서툴러" 라고 잔소리를 하셨다. 그러나 사라젠이 금세기를 대표하는 프로골퍼의 한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소년시절 리치몬트CC에서의 1타가 프로가 될 것을 결심케했다고 말하는 사라젠은 올해 나이 9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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